John William Waterhouse 1896 Pandora

PHILOSOPHIE

패러다임드래곤 세상을 바꾸는 용

철학 [Philosophie]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돈, 명예, 권력? 당신은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왜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잔인하고 참혹한 현실과 대면해야 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돈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속는 사람이 병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떤 환경과 교육이 그런 가치관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사고방식이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속담처럼, 남을 속이는 사람은 타인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불신 속에 평생 의심과 걱정 속에서 살게 된다. 설령 단죄로 인해 정의가 실현된다고 해도 피해자의 비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의 잔혹함이다.

우리는 대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정답은 하나가 아닌 경우도 있고, 단면적인 논리는 입체적인 실체를 포착하지 못해 역설에 빠지기도 한다.
흔히 “내가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방의 관점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진실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을 때가 많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창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6.43)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물리적인 외부 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에서 만들고 판단하게 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신념과 관점으로 서로 다른 현실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객관적 사실이나 본질이 아니라, 신념이란 창에 투영된 상(像)이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은 세상을 가능성과 희망으로 채워진 곳으로 보지만, 불행한 사람은 한계와 고통으로 가득 찬 곳으로 본다. 세상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 상태와 믿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인류 82억 명이 공존하는 객관적, 보편적 실제(實際, Real)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서 수많은 주관적 세계가 겹쳐져 있다.
누군가는 철학을, 누군가는 신을, 또 누군가는 과학을 믿으며, 각자의 신념으로 구축한 세계관 속에서 실재(實在, existence) 하는 세상을 경험한다


현실에는 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또 다른 무언가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믿음들은 모든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다른 관점의 충돌을 야기한다.
하지만 물리 법칙을 공유하는 객관적 현실은 이러한 믿음들이 충돌하지 않는 ‘믿음 중립 지대’로 작용한다.
각자의 주관적 신념이 믿음 중립 지대에 법칙에 위배 된다면 물리적 실체로 나타날 수 없고, 만약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건 우연처럼 보일 것이다. 주관적 믿음들은 각자의 정신세계 속에서만 실재한다.

이러한 주관적 세계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중심으로 합의될 때, 비로소 객관적 현실의 실체를 형성한다.

자연의 이치는 정의나 선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뿐이다.
부처는 "집착에서 고통이 시작된다"고 했다. 선악, 정의, 부와 명예, 권력 등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으며, 이는 인간이 만든 허상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부질없다.  

선과 악의 본질 

선의 보편적 기준: 황금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이 황금률은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강조된 보편적 규범이다. 이는 남과 나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 기반한다.
남을 나와 동일시했을 때,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남에게 행하는 것은 악이다.
선은 단순히 악의 부재가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를 이롭게 하려는 적극적 행동을 포함한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는 선악과 정의가 상대적으로 변질된다.
내 편이 선이고 적은 악이라는 관점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형성된 상대적 정의일 뿐이다.

그러나 선은 다른 이분법적 개념들과는 달리 단순히 악의 부재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선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며, 이를 넘어 적극적으로 타인과 공동체를 이롭게 하려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황금률에서 비롯된 선의 개념은 이러한 상대성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는 선이 악의 존재 없이도 독립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가치임을 보여준다.
단순한 반대 개념에 머물지 않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윤리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선의 반대는 악인가?

전통적으로 선과 악은 대립적인 이분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선의 반대는 반드시 악(惡)이 아닐 수 있다.

선과 악은 단순히 대립적인 관계로 설명되지 않으며, 그 사이에는 무지(無知)라는 중간 상태가 존재한다.

무지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로, 윤리적 성장과 자기 계발의 출발점이다. 비록 무지는 악처럼 해악을 의도하지 않지만, 도덕적 판단의 부재로 인해 결과적으로 악과 유사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는 단순히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무지는 선과 악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잠재적 상태로, 이를 극복하고 선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인간의 윤리적 책임과 성숙으로 이어진다.
무지를 극복하는 과정은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실천적 선택으로 나아가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선과 악의 본성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채로 태어난다.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한 채 행하는 행동은 무지가 초래하는 악이라 할 수 있다.

악은 결국 파멸로 이어지지만, 선은 열린 결말을 남긴다.

따라서 우리는 무지에서 벗어나 선을 배우고, 악을 억제하며 살아가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선을 행하기 위함'으로 귀결된다.

니체를 포함한 여러 철학자들은 무지와 인간의 선택에 대해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니체는 인간의 무지를 단순한 무지 자체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도덕과 관습을 "노예 도덕"으로 규정하며,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상태를 일종의 무지로 간주했다. 그는 인간이 이러한 무지를 넘어서는 "위버멘쉬(초인)"로 성장하기 위해 기존 가치를 의심하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무지에서 깨어나는 것은 단순히 기존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자기 성찰과 가치 재구축을 요구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칸트는 "네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말했다. 이는 무지가 단순히 몰라서 악을 행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고, 윤리적 판단을 통해 인간이 보편적 도덕법칙을 스스로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무지를 극복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를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무지 자체를 지혜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는 무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배우려는 자세야말로 무지를 극복하고 선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이 무지 속에서 살아가며, 감각적인 세계에 갇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했다.
그는 교육과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진리와 선)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철학자들은 무지를 단순한 지식의 부족으로 보지 않고, 자기 성찰과 윤리적 선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성숙을 이끌어내는 잠재적 상태로 이해했다. 무지를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선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과 악, 정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궁극적으로 실천과 연결될 때 의미를 가진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은 단순한 도덕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구현되었으며, 품앗이와 두레 같은 상호부조의 전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약 5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 정신은 지속 가능성을 증명했으며, 훈민정음 창제라는 혁신을 통해 백성을 위한 구체적 실현으로 이어졌다.
품앗이는 단순한 노동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는 구체적 실천이다. 내면적 성숙이 품앗이와 같은 상호 협력의 정신으로 확장될 때, 선과 정의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가치가 된다.

결국,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이 모든 철학이 꿈꾸는 인간사회의 이상을 가장 짧고 강력하게 실현하는 길이다. 이 철학적 가치를 되새기고 실천할 때, 우리는 서로를 이롭게 하며 진정한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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